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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라 시게노부 (15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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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라 시게노부(1549년 ~ 1614년)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다이묘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선봉으로 활약했다. 그는 일본으로 귀환할 때 조선 도공들을 강제로 데려가 일본 도자기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히라도 항을 개방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추진했다. 1568년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규슈 평정에 참여하여 도요토미 정권 내 지위를 확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히라도 번 초대 번주가 되었으며, 네덜란드 및 영국과의 무역을 통해 히라도 무역을 부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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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라 시게노부 (154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쓰라 시게노부 (마쓰라 사료 박물관 소장)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출생덴분 18년 (1549년)
사망게이초 19년 음력 5월 26일(1614년 7월 3일)
개명진신, 소신 (법명), 무가이안 소세이
별칭겐자부로 (통칭), 히라도 호인, 시키부쿄 호인
계명자안원전 천융원장공 법인, 자안원전 전 히주 태수 천융원장 법인
묘소나가사키현히라도시의 사이교사
관위종4위하・히젠노카미, 시키부쿄
막부에도 막부
주군류조지 다카노부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히젠히라도번주
씨족마쓰라 씨
아버지마쓰라 다카노부
어머니스기 다카카게의 딸
형제진신, 고토 고레아키, 치카시, 노부자네, 시사 스미타다의 처
정실사이고 주다카의 딸
측실고무기 님
자녀히사노부, 히다카 노부요시의 처, 노부마사, 고토 히로아키의 처, 사이고 스미나리의 처, 모모노 모시기, 미나미부사 모시기, 가쿠자에몬, 산시로
가문
마쓰라별(松浦星)

2. 생애

마쓰라 시게노부는 마쓰라 다카노부의 아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선봉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세웠다.[2] 일본으로 귀환할 때 100여 명의 조선 도공을 강제로 끌고 가 일본 도자기 기술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2] 히라도 항을 개방하여 외국과의 교역에 주력하였다.[2]

1599년, 가메오카 성(또는 히노다케 성) 건설을 시작하였으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들 히사노부가 서군에 가담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의심을 피하고자 건설 중이던 성의 일부를 불태웠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대응을 칭찬하며 서한을 통해 이키와 마쓰우라 군 6만 3,200석의 영지를 안도했고, 시게노부는 히라도 번 초대 번주가 되었다.[2]

1603년, 히사노부가 사망하자 손자 다카노부를 데리고 에도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하였다.[2]

아버지 시대에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로 옮겨가면서 히라도는 무역의 중심지 자리를 빼앗겼고, 마쓰라 가문의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시게노부는 이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605년, 네덜란드 선박 리후데 호가 풍후국에 표착했을 때, 선원 야코프 콰케르나크를 귀국시키기 위해 직접 배를 만들어 주었다. 콰케르나크는 이에야스의 친서를 가지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일본 무역 진흥을 호소했고, 1609년 네덜란드 배가 처음으로 히라도 항에 입항하였다. 시게노부는 네덜란드 사절을 스루가로 데려가 무역 허가를 얻고, 히라도에 네덜란드 상관을 설치했다.[2] 1613년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존 세이리스가 히라도에 도착하여 영국 상관을 설치하고, 윌리엄 애덤스를 초청하여 히라도 무역을 재건하였다.[2]

2. 1. 출생과 성장

덴분 18년(1549년), 마쓰라 다카노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기 다카카게의 딸이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쓰카하라 다케카쓰에게 검술을 배웠다. 말년에는 다케야 시게카쓰에게 비전을 전수받는 등 검술의 달인이었으며, 문무 양면에 뛰어났고, 와카(和歌)도 즐겼다.

2. 2. 가독 상속과 세력 확장

1568년, 오토모 요시진에게서 무기를 하사받고 원복하여, 은퇴한 아버지에게서 가독을 물려받았다.[2] 상신포(相神浦)의 마쓰라 단고노카미 오야(무네카네)(松浦丹後守親(宗金))가 후계자를 아리마 나오즈미의 아들에서 마쓰라 다카노부의 아들 마쓰라 오야(九郎)로 바꾼 것에 대해 전투가 벌어졌을 때, 시게노부는 상신포 측을 지원하여 승리하였다.[2] 1572년에는 오무라 스미타다를 공격하여 1574년에 항복시켰고, 스미타다의 딸(쇼토인)을 아들 마쓰라 히사노부의 아내로 맞이하여 화의를 맺었다.[2]

이 무렵, 히젠에서 류조지 다카노부의 세력이 커져 시게노부도 그 휘하에 들어가야만 했지만, 1584년에 다카노부가 전사하자 다시 독립하였다.[2] 같은 해 스페인 배가 히라도에 도착하였다.[2]

1586년 3월, 중앙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물을 바쳐 히데요시를 기쁘게 하였다.[2] 4월, 오무라 준충, 아리마 요시즈미, 무네 요시토시, 하타 노부토키, 아리타 사카루 등이 공격한 히로타 성 전투에서 이들의 군세를 물리쳤다.[2] 히데요시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시마즈 정벌을 미리 알게 되었고, 아버지와 함께 규슈 정벌에 참전하였다.[2] 히데요시에게 3대에 걸쳐 알현했을 때, 영지 증가를 바라지 않고 소령 안도에 만족한다고 말하여 히데요시를 더욱 기쁘게 하였고,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 지위를 확립하였다.[2]

1589년에 출가하였으나, 마쓰라 씨의 실권은 계속 장악하였다.[2]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도 수군을 파견하였다.[2]

2. 3.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

1586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공물을 바쳐 그의 기쁨을 샀다. 같은 해 오무라 준타다, 아리마 요시즈미, 소 요시토모, 하타 노부토키, 아리타 사카루 등의 공격을 받은 히로타 성 전투에서 이들의 군세를 물리쳤다.[2] 히데요시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시마즈 정벌을 미리 알고 아버지와 함께 규슈 정벌에 참진하였다. 히데요시에게 3대에 걸쳐 알현하면서 영지 증가를 바라지 않고 소령 안도에 만족한다고 말하여 그의 신임을 얻고 도요토미 정권 내 지위를 확립하였다.[2]

2. 4. 임진왜란 참전

임진왜란에 아들 히사노부와 함께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선봉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올렸다.[2] 일본으로 귀환 할 때 100여 명의 조선 도공을 강제로 끌고 갔다. 조선 도공들로 인하여 일본 도자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임진왜란에서는 먼저 전진 기지의 하나로 이키섬에 승본성 축성을 지시받은 후, 종씨와 함께 조선 통으로 기대되어 향도 역을 맡았다. 동생 신지쓰, 아들 히사노부와 함께 출정하여, 오무라 요시아키(순충의 아들), 아리마 하루노부, 오도 순현 등 히젠의 여러 장수와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대에 속하여 조선으로 건너가, 서전부터 7년에 걸쳐 활약하였다. 작원관 전투, 울산성 전투, 순천성 전투, 노량 해전 등에서 공을 세웠다.

출정한 3,000명 중 1,918명의 가신이 전사하였지만, 『松浦法印鎮信朝鮮七ヶ年間陣中日記之抄』에 따르면 히라도에서 공을 세우려고 뒤늦게 참전한 자가 많아 귀국할 때는 오히려 늘어나 7,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히라도와는 배가 왕래하여 전리품을 자주 가져왔고, 조선인 노비 수백 명을 데려와 영내에 귀화시켰는데, 그중에는 구마가와(こもがい) 도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삼천내소의 시조가 되었다.

2. 5. 히라도 번 번주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쓰라 시게노부의 대응을 칭찬하며 서한을 통해 이키와 마쓰우라 군 6만 3,200석의 영지를 안도하였다. 이로써 시게노부는 히라도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1607년 건축 중이던 히라도 성은 큰 불로 거의 전소되었으나, 약 100년 후인 1707년 5대 번주 마쓰라 다카시 시대에 재건되었다.[2]

2. 6. 죽음

게이초 19년(1614년)에 사망했다. 향년 66세였다. 시게노부는 열렬한 진언종 신자로, 영내에서 기리시탄을 배척했다. 스스로 건립하여 묻힌 사이쿄지(히라도 시)에는 시게노부의 상이 있다.[2]

3. 평가

시게노부는 개방을 통한 혁신을 추구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무장화 기초를 다졌다.

4.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마쓰우라 다카노부(1529년 - 1599년)
어머니스기 다카카게의 딸
정실사이고 준요의 딸
장남마쓰우라 히사노부(1571년 - 1602년)
측실코무기 님 - 조선 여성
생모 불명의 자녀
장녀히다카 노부요시의 처
차남마쓰우라 노부마사(쿠라도)
차녀고토 히로아키의 처
삼녀사이고 준세이의 처
사녀모모노 타로에몬의 처
오녀미나미 소우에몬의 처
남자카쿠자에몬 - 히다카 카츠히데의 양자
남자산시로 - 미나미 소우에몬의 양자


5.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관계

임진왜란에 아들 히사노부와 함께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의 선봉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을 올렸다. 전후 일본으로 귀환 할 때 100여 명의 조선 도공을 강제로 끌고 갔다. 조선 도공들로 인하여 일본 도자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1] 그리고 히라노 항을 개방하여 외국과의 교역에 주력하였다.[1]

참조

[1] 문서 廃寺
[2] 문서 ポルトガル船と平戸・長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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